충북 영동군 심천면 옥계리에 위치한 옥계폭포
옛부터 난계 박연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시인들이 모여 옥계폭포의 아름다움을 찬탄하는 글을 많이 남긴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박연[朴堧]은
<1378(우왕 4)~ 1458(세조 4)조선 초기의 문신·음악가>
세종 때 율관(律管:동양에서 악율의 표준을 정하기 위하여 만든 12개로 된 관)을 만들어 편경(編磬)을 제작하는 등 조선 초기
음악완비에 많은 공헌을 했다. 왕산악(王山岳)·우륵(于勒)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으로 불린다.
본관은 밀양. 초명은 연(然). 자는 탄부(坦夫), 호는 난계(蘭溪).
초년
할아버지는 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 시용(時庸)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천석(天錫)이며, 어머니는 경주 김씨이다.
어려서 고향인 충청북도 영동의 향교에서 공부를 했다. 11세에 모친상을 당하자 1년의 상이 끝난 뒤에도 3년 동안 여막에 거처했으며,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상을 치렀다. 예악(禮樂) 연구에 뜻을 두어 유적(遺籍)을 수집하여 그 의칙(儀則)을 연구했으며,
음률에 대한 이해가 뛰어났다. 1405년(태종 5) 생원시에, 1411년 문과에 급제했다.
그후 집현전교리·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을 거처 세자시강 원문학으로 있으면서 당시 세자였던 세종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아악의 정비
세종 때는 고려말 이래의 혼란이 수습되고 정국이 안정되어 문물제도의 정비사업이 각 방면으로 전개되었는데,
그는 음악면에서 세종을 보익(輔翼)하여 구래의 면목을 일신하게 되었다. 1426년(세종 8) 봉상판관(奉常判官) 겸 악학별좌(樂學別坐)에 임명되어 향악(鄕樂:우리나라 음악을 당악에 대하여 이르는 말), 당악(唐樂:신라시대 이후에 전래된 중국 속악의 총칭), 아악의 율조(律調) 등을 조사했으며, 악기의 그림과 악보를 실어서 한 권의 악서(樂書)를 편찬하자고 상소했다. 그는 아악을 정비하는 데 있어서
먼저 편경과 편종(編鐘)을 조율하는 데 필요한 율관 제작에 착수했다. 해주산의 거서(秬黍)와 남양산의 경석(磬石)을 사용하여
제작한 율관에 의거하여 1427년 편경 12매(枚)를 만들었다. 1430년 악기의 조율을 새롭게 한 그는 조정의 조회(朝會)에 향악 대신에
아악을 쓸 것을 건의했다. 그의 개혁안은 매달 1일과 16일의 조회에만 아악을 쓰고, 당상(堂上)과 당하(堂下)의 관현악을 동시에
합주하고, 조회의 아악은 선궁(旋宮) 즉 이조(移調)를 쓰자는 것이었으며, 이해 10월에는 남급(南汲)·정양(鄭穰) 등과 함께
조회악기(朝會樂器)를 제작했다. 이듬해 정월, 세종이 근정전(勤政殿)에서 신년하례를 받을 때 새롭게 제정된
아악을 처음으로 연주하게 해 안마(鞍馬)를 하사받았다. 같은 해 회례(會禮)에도 아악을 사용하자고 건의하여 5월에 정양과 함께
회례악공(會禮樂工)과 무동(舞童)의 관복(冠服)을 왕에게 올리고, 사정전(思政殿)에 나온 세종 앞에서 문무이무(文武二舞)의
작변지절(作變之節)과 속부남악지기(俗部男樂之伎)를 추게 했다. 1433년 정월 처음으로 문무이무가 회례에 채택되었고,
속악정재(俗樂呈才:궁중 잔치에 사용하던 춤과 노래)에도 기생을 폐하고 남자가 추게 했다.
만년
1433년 7월 요언혹중(妖言惑衆)의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박도(朴蹈)의 상소로 파직되었으나, 세종의 배려로 아악에는
그대로 종사했으며 공조참의·첨지중추원사·동지중추원사 등을 지냈다. 1445년 명나라 황제 영종(英宗)의 설절사로 다녀온 뒤
중추원부사·인수부윤 등을 역임했다. 1488년 세종이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문소전(文昭殿) 옆에 불당을 낙성하자 경찬회(慶讚會)에 사용될 관현악 반주곡을 새로 짓고 악기를 새로 만들어 공인(工人) 50명과 무동 10명에게 연습시켰다.
1456(세조 2) 셋째 아들인 계우(季愚)가 단종복위에 관련되어 죽음을 당했으나, 그는 3조(朝)를 역사(歷仕)한 원로라 하여
죽음을 면하고 파직되어 고향에 내려갔다. 저서로는 〈난계유고〉가 있다. 영동 초강서원(草江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브리태니커백과사전>
옥계폭포는
영동은 국악의 거성이면서 예문관대제학과 이조판서를 지냈고 3대왕을 섬긴 선비로 여러 고위 관직을 두루 거치며 한 시대를
풍미 했던 인물 난계 박연이 낳고 자란 고향이며 살아 생전 고향에 돌아오면 그가 자주 찾았다는 웅장한 폭포가 있다.
이 폭포는 힘차고 아름다워 옛날에는 시인묵객들이 아름다움을 노래했다는 명소이기도 하다.
국악의 거성 난계가 즐겨 찾았고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옥계폭포는 영동군 심천면 옥계리로 진입하여
천모산 골짜기로 들어서서 산길을 따라 약 1km 전방에 위치한다.
옥계폭포의 장관은 눈이 부시다. 이곳이 바로 난계가 즐겨 찾아 피리를 불었다는 폭포이며 시인묵객들의 발길도 잦았다 하니
“왜아니 그럴까” 싶다. 다가갈수록 장쾌하게 흘러내리는 폭포의 시원한 물소리와 뿜어져 나오는 물보라가 세차다. 그 장관에 앞도 되어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잠시 황홀경에 빠진다. 저렇게 수천년을 흘러내렸을 옥계폭포의 물줄기는 바위산을 움푹 깍아 절경을 이루며 바위틈으로 세찬 물보라를 토해내고 있다. 현대문명의 이기 에어콘이 이처럼 시원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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