둠벙의 추억
어린 시절 시골에서의 생활 사전에는 휴가라는 말이 필요가 없다
농삿일하시는 부모님이시고 끼니 걱정이 최우선 과제이니 나들이는 생각도 못하던 시절.
하루에 한번 가는 서울행 버스(엔진이 운전석 옆에 있고 겨울철에는 추위에 시동이 안 걸려 차 하부에 불을 피워서 녹이던 시절)는 다행스럽게 있어서 문경 새재를 휘감아 넘고 연풍을 경유하여 수안보, 충주, 음성, 장호원, 이천, 광주를 거쳐 서울 마장동 터미널에 도착을 하였는데 서울 도착하기까지는 100% 비포장 도로여서 털거덕 거리기는 당연한 것이고 에어컨이 없어니 창문을 열어 놓고 가다보니 먼지에 목이 칼칼하고 코에는 먼지가 한가득 들었을 정도였으니...
여름휴가 말도 못 듣도 보도 꿈도 못 꾸어 보고 어린 시절을 보냈답니다
강은 더더욱 아니고 큰 냇가도 아닌 도랑이 동네 앞을 흐르는데
동네에서 도랑 위쪽으로 700m정도 리어카 길 따라 가다가 논 둑 길로 접어 200m 가면 선녀가 목욕하던 정도는 아니지만 바위가 파이고 바닥에는 모래와 잔자갈이 깔린 5명 정도 들어가서 중태미 새끼들과 목간을 하면 좋은 둠벙이 있어서 동네 아이들과 어른들이더운 몸을 식히곤 하였답니다.
둠벙가는 논둑길에는 바닥에 아주 질긴 풀이 있어서 풀을 나누어 묶어두어 목간 오는 사람들이 넘어지라고 풀로 올가미를 만들어 놓곤 하였지만...........
비료와 농약이 없던 시절이라 지난 여름에 산에 칡덩쿨과 잡풀을 베어 소나무에 묶어 두었다가 봄에 그 말린 풀더미를 작두로 썰어서 논바닥에 뿌리고 소로 논을 갈아서 모내기를 하니 저수지도 없어 좀 가물면 물싸움 하면서 용두레를 도랑에 설치하여 물을 퍼지만 가뭄과 비료 없이 농사 지으니 영양실조에 도열병이 발병하여도 농약 없으니 그저 한숨이요
낙담이 나올 수밖에 없으셨을 울 부모님의 심정을 지금 농사를 지어보니 가슴이 벅차네요...
그럴 때 1965년경에 농촌진흥청에서 나온 통일벼가 보급되어 병충해에 강하고 수확량이 많아지나 벼 귀가 물러서 낟알이 떨어지고 후에 밥맛이 떨어진다는 평이 있었는것 같으네요.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다고 밥맛 없다는 말을 닭이 듣고는 아 글쎄 닭도 통일벼 쌀은 안 먹는다네요.
허허 참!
어즈버! 지금은 그 둠벙이 다 메꾸어지고 말없는 바위만 자리를 간신히 지키고 벼농사 짓던 논둑길은 아래 논 위 논 합배미하여 밭으로 변하였데요.
그 냇물은 1급수에서만 사는 꾸구리, 텅개이, 송사리, 다슬기등이 많지는 않지만 근근히 잡히는 도랑으로 밤에는 솔가지에 불붙여 불치기하고 겨울에는 꼬불꼬불 도랑에서 썰매를 타던 도랑이었고 비가 웬만큼만 와도 도랑이 좁아서 물이 불어서 밭에를 가지 못하였지만 지금은 시멘트 다리가 놓이고 농로길이 포장되는가하면 그 보다 작은 도랑에는 시멘트 관을 놓아 가재 한 마리, 개구리 한 마리, 중테미 한 마리도 없는 도랑으로 변한곳도 있데요.
또 그 둠벙 윗쪽에는 저수지도 축조되어 물걱정이 없게 되었답니다
그 도랑은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지만 예전만은 못하겠지요?
벌 조십하세요!!
요즘은 벌도 겁이 없어서 지붕 처마, 길옆 가리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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